예루살렘 다윗 성 아래에는 지금도 물이 흐르는 굴이 하나 있습니다. 길이가 500m를 넘는데, 사람이 곡괭이로 바위를 쪼아 만든 길입니다. 그것도 양쪽 끝에서 동시에 파 들어가 중간에서 만났습니다.
이 굴이 히스기야 터널(실로암 터널)입니다. 그리고 그 벽에서, 두 팀이 바위 너머로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마침내 곡괭이를 마주 친 순간을 적은 여섯 줄의 글이 나왔습니다. 실로암 비문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이 터널이 왜 필요했는지, 비문에는 무엇이 적혀 있는지, 그리고 성경의 기록과는 어디까지 이어 볼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다윗 성 지하의 히스기야 터널 내부. 지금도 기혼 샘의 물이 흐른다.
사진: Ian Scott /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성 밖에 있던 샘
고대 도시에게 물은 곧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성 안에 물이 있느냐 없느냐가 도시의 운명을 갈랐으니까요.
예루살렘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인 다윗 성에는 바로 이 점에서 약점이 있었습니다. 도시의 주된 물줄기인 기혼 샘이 성 동쪽 기드론 골짜기 아래, 지키기 어려운 낮은 곳에 있었던 겁니다.
기원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왕 산헤립의 군대가 다가오자 유다 왕 히스기야는 이 문제부터 풀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가 성 밖의 물 근원을 막아 앗시리아 군대가 물을 얻지 못하게 했다고 기록합니다(역대하 32:3–4). 그리고 그 물을 성 안쪽으로 끌어들이는 공사를 벌였습니다.
곧게 가지 않은 533m
히스기야 터널은 기혼 샘에서 다윗 성 남서쪽의 실로암 못까지 이어집니다. 길이는 약 533m인데, 두 지점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320m밖에 되지 않습니다. 터널이 S자로 크게 굽어 있기 때문입니다.
양 끝의 높이 차이는 30cm 남짓입니다. 500m가 넘는 거리에서 그 정도의 아주 완만한 기울기를 맞춰 놓은 덕분에, 물이 고이지 않고 샘에서 못까지 스스로 흘러갑니다. 천장 높이는 구간마다 들쭉날쭉해서 허리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는 곳도 있고, 몇 미터 높이로 파낸 곳도 있습니다.
19세기에 미국 성서학자 에드워드 로빈슨(1838년)과 영국 공병 장교 찰스 워런(1867년) 등이 터널 안을 직접 지나가며 조사하고 측량했습니다. 지금은 다윗 성 국립공원에서 일반 방문객도 물이 흐르는 이 터널을 걸어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다만 운영 여부나 수위는 그때그때 달라서, 가실 분은 미리 확인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벽에 남은 여섯 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의 실로암 비문 원본. 글자가 얕게 새겨져 있다.
사진: ywpark2003 (Prof. Yong Woo Park) / Wikimedia Commons, CC0
1880년, 터널의 실로암 쪽 출구에서 멀지 않은 벽에서 현지 소년들이 글자가 새겨진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고대 히브리 문자로 쓴 6행의 비문이었습니다.
이 비문은 순탄하게 박물관에 간 게 아닙니다. 1891년 누군가 몰래 벽에서 잘라 내다가 여러 조각으로 깨뜨렸고, 그 조각들을 되찾아 당시 이 지역을 다스리던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옮겼습니다. 원본은 지금도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고, 터널 안에는 비문이 있던 자리만 남아 있습니다.
첫 부분은 깨져서 읽을 수 없습니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번역을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 뚫음. 그리고 이것이 뚫음의 경위이다. […] 굴착꾼들이 각자 동료를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고 있을 때, 아직 3규빗을 더 뚫어야 했을 때, 동료를 부르는 사람의 소리가 들렸다. 바위 속에 오른쪽[과 왼쪽]으로 틈(zdh)이 있었기 때문이다.
뚫리던 날, 굴착꾼들은 각자 동료를 향해 곡괭이와 곡괭이를 마주 쳤다.
그러자 물이 샘에서 못까지 1,200규빗을 흘렀다. 굴착꾼들의 머리 위 바위의 높이는 100규빗이었다.
3규빗이면 1.5m가 채 안 되는 거리입니다. 바위 저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 사람들 마음이 어땠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비문의 핵심 표현 두 개를 원래 글자로 보면 이렇습니다.
| 원문 (고대 히브리 문자) | 음역 | 뜻 |
|---|---|---|
| 𐤂𐤓𐤆𐤍 𐤏𐤋 𐤂𐤓𐤆𐤍 | GRZN ʿL GRZN | 곡괭이가 곡괭이를 (마주 쳤다) |
| 𐤅𐤉𐤋𐤊𐤅 𐤄𐤌𐤉𐤌 | WYLKW HMYM | 그리고 물이 흘렀다 |
비문이 말하는 터널 길이 1,200규빗도 한번 계산해 볼 만합니다. 실제 길이 약 533m를 1,200으로 나누면 1규빗은 약 44cm가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흔히 쓰던 규빗(약 44–45cm)과 잘 맞는 값입니다. 공사한 사람들이 숫자를 대충 적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이 비문에 왕의 이름도, 신에게 바치는 말도 없다는 점입니다. 왕의 업적을 자랑하는 공식 비문이라기보다는 공사의 결정적인 순간을 남긴 기록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비문은 고대 히브리어 산문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 보여 주는 귀한 자료로도 꼽힙니다.
두 팀은 어떻게 서로를 찾았을까
터널 한가운데쯤에는 지금도 두 팀의 굴이 서로 조금 어긋나 있다가 방향을 꺾어 만나는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방향을 고치느라 파다 만 막다른 굴들도 보이고요. 만난 곳이 정확히 한가운데는 아닙니다.
나침반도 측량 장비도 없던 시대에, 그것도 굽은 길로 어떻게 서로를 찾았을까요. 학자들의 설명은 크게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자연 균열을 따라갔다는 설명입니다. 예루살렘의 석회암 지대에는 물이 스며들며 생긴 자연스러운 틈이 있는데, 굴착꾼들이 이 틈을 따라 팠기 때문에 터널이 S자로 굽었다는 겁니다(D. Gill 등). 비문에 나오는 '바위 속의 틈(zdh)'이 이 설명의 근거로 자주 언급됩니다. 다만 이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아직 의견이 갈립니다.
다른 하나는 비문에 적힌 그대로, 서로 부르는 소리와 곡괭이 소리를 들으며 방향을 맞췄다는 설명입니다.
두 설명이 서로 부딪치는 건 아닙니다. 큰 방향은 바위의 틈을 따라 잡고, 마지막 몇 미터는 소리로 맞췄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수로 공사
성경은 히스기야의 수로 공사를 여러 곳에서 언급합니다.
역대하 32:30 (개역개정)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열왕기하 20:20 (개역개정)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이사야 22:9–11도 앗시리아의 위협 앞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성벽을 손보고, 아랫못의 물을 모으고,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든 일을 이야기합니다. 외경인 집회서 48:17에도 히스기야가 성읍을 튼튼히 하고 바위를 뚫어 물을 끌어들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기혼 샘에서 다윗 성 서쪽으로. 성경이 말하는 이 물길은 실제 터널이 지나가는 방향과 같습니다.
연대는 어떻게 알았을까
2003년 국제 학술지 Nature에 실린 연구(Frumkin, Shimron, Rosenbaum)가 이 질문에 꽤 구체적인 답을 내놓았습니다. 연구진은 터널 벽 회반죽 속에 섞인 식물 조각의 방사성탄소 연대와, 터널 안에서 자란 종유석의 우라늄-토륨 연대를 함께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기원전 700년 무렵이었습니다.
비문의 글자 모양도 기원전 8세기 말쯤의 히브리 문자로 분류됩니다. 문자, 과학적 연대, 성경 기록이 모두 히스기야 시대, 곧 기원전 701년 산헤립 침공 전후를 가리키는 셈입니다.
그래도 짚어 둘 것
여기서 하나는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실로암 비문에는 히스기야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터널을 히스기야와 연결하는 근거는 성경의 기록, 비문의 문자 형태, 그리고 연대 측정입니다. 근거가 여러 갈래에서 같은 쪽을 가리키기 때문에 '히스기야 시대의 터널'로 보는 것이 학계의 다수 견해입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R. Reich, E. Shukron 등)는 공사가 히스기야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고, 연대 논의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눈먼 사람에게 가서 씻으라고 한 실로암 못과는 어떤 관계일까 궁금해하시는 분도 많습니다. 2004년 다윗 성 남쪽에서 제2성전 시대(예수님 시대)의 실로암 못 유적이 발굴되었고, 이곳을 요한복음 9:7의 못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다만 히스기야 시대의 못과 정확히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아직 연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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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기
| 항목 | 내용 |
|---|---|
| 유적·유물 | 히스기야 터널 (실로암 터널), 실로암 비문 |
| 연대 | 기원전 700년경 (히스기야 시대, 산헤립 침공 전후) |
| 규모 | 길이 약 533m(S자), 직선거리 약 320m, 고도차 약 30cm |
| 비문 발견 | 1880년, 실로암 쪽 출구 근처 벽 / 1891년 이스탄불로 이송 |
| 언어 | 고대 히브리어, 6행 |
| 소장 | 비문: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 터널: 예루살렘 다윗 성 |
| 함께 읽을 성경 | 열왕기하 20:20, 역대하 32:3–4, 30, 이사야 22:9–11 |
참고한 자료
- A. Frumkin, A. Shimron & J. Rosenbaum, "Radiometric dating of the Siloam Tunnel, Jerusalem," Nature 425 (2003)
- J.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3rd ed. (1969), p. 321
- D. Gill, "Subterranean Waterworks of Biblical Jerusalem: Adaptation of a Karst System," Science 254 (1991)
사진 출처: ① Ian Scott, "Inside Hezekiah's Tunnel",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② ywpark2003 (Prof. Yong Woo Park), "Siloam Inscription from Hezekiahs Tunnel Istanbul Archaeology Museums.jpg", Wikimedia Commons, CC0
이름 없는 굴착꾼들이 남긴 여섯 줄에는 왕도 신도 나오지 않습니다. 바위 너머에서 들려온 동료의 목소리와, 마침내 물이 흘렀다는 이야기뿐입니다. 그 물은 2,700년이 지난 지금도 같은 길로 흐르고 있습니다.
지난 글의 테일러 프리즘에서 산헤립은 히스기야를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었다고 했습니다. 그 새장 안에서 예루살렘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마 이 터널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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