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01년, 근동 최강의 제국 앗시리아가 작은 유다 왕국으로 쳐들어옵니다. 성경은 이 전쟁을 꽤 길게 기록합니다. 그런데 같은 전쟁을 공격한 쪽, 그러니까 앗시리아 왕이 직접 남긴 기록도 있습니다.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는 여섯 면짜리 점토 기둥, 테일러 프리즘입니다. 산헤립 왕이 자기 원정을 자랑하려고 만든 문서인데, 읽다 보면 이상한 데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도시들은 어떻게 무너뜨렸는지 자세히 쓰면서, 예루살렘 이야기에서만 결말이 빠져 있거든요. 그 빈자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이 프리즘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대영박물관의 테일러 프리즘. 여섯 면에 산헤립의 원정 기록이 쐐기문자로 빼곡히 새겨져 있다.
사진: David Castor /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히스기야, 제국에 등을 돌리다
기원전 8세기 말 앗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지중해 해안까지를 손에 쥔 제국이었습니다. 기원전 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시리아에 무너졌고, 남쪽에 남은 유다도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처지였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이 질서를 깨기로 합니다. 이집트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주변 나라들과 함께 조공을 끊은 거죠. 마침 앗시리아에서는 왕이 바뀐 직후였습니다. 새 왕 산헤립(재위 기원전 705–681년)은 기원전 701년 대군을 이끌고 반란을 정리하러 내려옵니다. 그의 세 번째 원정입니다.
니느웨에서 나온 육각기둥
테일러 프리즘은 높이 약 38cm의 육각기둥 모양 점토 문서입니다. 여섯 면에 아카드어 쐐기문자로 산헤립의 원정 여덟 번이 차례로 적혀 있습니다. 앗시리아 왕들은 이런 연대기를 여러 부 만들어 궁전이나 성벽 기초에 묻어 두곤 했습니다.
이름은 1830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지금의 이라크 모술 부근)에서 이 프리즘을 손에 넣은 영국의 로버트 테일러 대령에게서 왔습니다. 대영박물관이 사들인 것은 1855년이고, 작성 시기는 기원전 691년경입니다. 산헤립 연대기 가운데 가장 나중에 정리된 판본에 속합니다.
같은 내용을 담은 사본이 몇 개 더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시카고대학교 연구소가 가진 프리즘(기원전 689년)과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의 프리즘(기원전 691년)이 대표적인데, 내용이 거의 같아서 학자들은 이 사본들을 서로 맞춰 가며 본문을 읽습니다.
페니키아에서 유다까지

테일러 프리즘 표면의 쐐기문자. 한 면에 수십 줄씩 촘촘히 새겨져 있다.
사진: David Castor /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세 번째 원정 기록은 지중해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순서로 이어집니다. 먼저 페니키아의 시돈 왕 룰리가 바다 건너로 달아나고 해안 도시들이 항복합니다. 다음은 블레셋 땅인데, 반란을 일으킨 아스글론 왕을 사로잡아 앗시리아로 끌고 갑니다.
그다음 에그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그론 사람들은 앗시리아 편에 서 있던 자기 왕 파디를 쇠사슬로 묶어 히스기야에게 넘겼다고 합니다. 이들을 도우러 이집트와 구스(누비아) 군대가 올라오지만, 산헤립은 엘드게 평원에서 그 군대를 물리칩니다.
남의 나라 왕을 넘겨받아 가둘 정도였다면, 히스기야는 이 반앗시리아 동맹에서 꽤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 전쟁 중에 구스 왕 디르하가가 앗시리아와 싸우러 나왔다는 소식이 나옵니다(열왕기하 19:9).
그리고 마침내 유다입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견고한 성읍 46개와 주변의 셀 수 없이 많은 마을을 포위해 함락했고, 남녀노소 200,150명과 수많은 가축을 전리품으로 끌고 갔다고 씁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여기까지는 앗시리아 연대기다운 승전보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대목에 오면 말투가 달라집니다. 학자들의 번역을 바탕으로 요지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그(히스기야)를 새장 속의 새처럼 그의 왕도 예루살렘 안에 가두었다. 성문에서 나오는 자를 막으려고 토성을 쌓았다.
히스기야는 나의 위엄에 압도되어,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와 보석, 상아 침상, 자기 딸들과 궁녀들을 니느웨로 보내왔다.
아카드어로는 kīma iṣṣur quppi … ēsiršu, "새장의 새처럼 … 그를 가두었다"라는 표현입니다.
가두었다, 토성을 쌓았다, 조공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성을 함락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를 사로잡았다는 말도 없고요. 앗시리아 왕의 연대기는 승리를 부풀리는 데 거침이 없는 문서입니다. 다른 도시들은 어떻게 무너뜨리고 누구를 처형했는지까지 적어 두었습니다. 그런 문서가 예루살렘 앞에서만 '가두었다'에서 멈추고, 조공도 나중에 니느웨로 보내왔다고 적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는 이 대목을 예루살렘 공략이 끝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신호로 읽습니다. 함락했다면 이 문서가 그 이야기를 빼놓았을 리가 없으니까요.
성경이 기록한 같은 전쟁
성경은 이 원정을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 역대하 32장에서 유다 쪽 시선으로 기록합니다. 두 기록을 나란히 놓아 보면 이렇습니다.
| 사건 | 테일러 프리즘 | 성경 |
|---|---|---|
| 유다 성읍 함락 | 견고한 성읍 46개 함락 |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점령하매" (왕하 18:13) |
| 라기스 | 프리즘에는 없음, 니느웨 궁전의 라기스 부조에 함락 장면 | 산헤립이 라기스에 머묾 (왕하 18:14, 17) |
| 히스기야의 조공 |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 금 30달란트, 은 300달란트 (왕하 18:14) |
| 예루살렘 | 포위했으나 함락 기록 없음 | 포위했으나 함락되지 않음 |
| 결말 | 니느웨로 돌아감 |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왕하 19:36) |
라기스 이야기를 조금 덧붙이면, 산헤립은 유다의 둘째 도시 라기스를 함락한 장면을 니느웨 궁전 벽에 커다란 부조로 새겼습니다. 1840년대 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가 발굴했고 지금은 이 부조도 대영박물관에 있습니다. 라기스는 그림으로까지 남길 만큼 자랑했는데, 예루살렘을 함락한 그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은 앗시리아군이 물러난 이유를 이렇게 적습니다.
열왕기하 19:35–36 (개역개정)
³⁵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³⁶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이어서 37절은 산헤립이 훗날 니스록 신전에서 경배하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부분은 앗시리아·바빌로니아 쪽 기록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산헤립은 기원전 681년 아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숫자가 맞지 않는 곳들
모든 게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부분은 그대로 적어 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조공입니다. 금 30달란트는 양쪽이 같은데, 은은 성경이 300, 프리즘이 800입니다. 앗시리아 쪽이 부풀렸다는 견해, 조공 말고 나중에 넘어간 재물까지 합친 숫자라는 견해, 양쪽이 쓴 무게 단위가 달랐다는 견해가 있고, 아직 하나로 정리되지는 않았습니다.
포로 200,150명이라는 숫자도 그 시대 유다 인구를 생각하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과장으로 보는 학자가 많습니다. 숫자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부분, 앗시리아군이 왜 물러났는가입니다. 프리즘은 여기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산헤립 군대가 이집트 국경에서 밤사이 들쥐 떼에게 활시위와 방패 끈을 갉아 먹혀 물러났다는 이집트 쪽 이야기를 전합니다(『역사』 2.141). 이걸 쥐가 옮기는 전염병과 연결해 보는 학자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해석이고 직접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프리즘이 보여 주는 것은
여기서도 선을 분명히 그어 두고 싶습니다.
테일러 프리즘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기원전 701년 산헤립이 유다를 쳤고 히스기야가 조공을 바쳤다는 것,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함락했다고 적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산헤립이 니느웨로 돌아갔다는 것. 이 세 가지는 성경의 기록과 잘 맞습니다.
반대로 프리즘은 퇴각의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룻밤 사이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증언이고, 프리즘이 그것을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결말, 곧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공격한 쪽 기록의 침묵과 정확히 겹칩니다.
참고로 '산헤립 프리즘'이라는 이름도 자주 보이는데, 이건 같은 연대기를 담은 사본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대영박물관 소장본을 따로 부를 때 '테일러 프리즘'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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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기
| 항목 | 내용 |
|---|---|
| 유물 | 테일러 프리즘 (Taylor Prism), 산헤립 연대기 |
| 연대 | 기원전 691년경 작성 (유다 원정은 기원전 701년) |
| 입수 | 1830년 니느웨, 로버트 테일러 대령 / 1855년 대영박물관 구입 |
| 재질·언어 | 점토 육각기둥(높이 약 38cm), 아카드어 쐐기문자 |
| 소장 | 대영박물관(런던) |
| 핵심 구절 | "새장 속의 새처럼 예루살렘에 가두었다", 성읍 46개, 금 30달란트 |
| 함께 읽을 성경 | 열왕기하 18:13–19:37, 이사야 36–37장, 역대하 32장 |
참고한 자료
- J. B. Pritchard (ed.), Ancient Near Eastern Texts, 3rd ed. (1969), pp. 287–288
- A. K. Grayson & J. Novotny, The Royal Inscriptions of Sennacherib, King of Assyria (704–681 BC), Part 1 (RINAP 3/1, 2012)
- 헤로도토스, 『역사』 2.141
사진 출처: ① David Castor, "Taylor Prism-1.jpg" ② David Castor, "Taylor Prism-2.jpg" (모두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제국은 패배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록하지 않은 빈칸도 2,700년 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46개 성읍을 하나하나 자랑하던 문장이 예루살렘 앞에서만 '가두었다'로 끝나는 걸 보면, 그 빈칸이 오히려 가장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전쟁을 앞두고 히스기야가 바위를 뚫어 만든 수로, 히스기야 터널과 실로암 비문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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